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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35] 번개 맞은 허리와 옥상 위의 미생
    삶과 사유의 기록/50대 인생 2막 도전기 2026. 9. 2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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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다음 날이다. 하루 푹 쉬고 나왔지만, 50줄을 넘긴 몸뚱어리는 아침마다 삐걱거린다. 그래도 아직은 내 두 발로 땅을 딛고 온전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하며 새벽을 맞았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무심코 기침을 한 번 '콜록' 뱉었는데, 방심한 탓이었을까. 순간 허리 뒤쪽에서 번개가 찌릿하고 번쩍였다. 엉덩이 바로 위 오른쪽 허리춤을 바늘로 쑤시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하, 샤갈. 이 타이밍에 허리가 터지면 오늘 하루 장사는 어쩌라는 말인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불길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제발 일시적인 신호이기를 빌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화장실 불을 켜고 세면대 앞에 서서 나만의 ‘생존 세수법’에 들어갔다. 다리 보폭을 어깨너비보다 양옆으로 10cm 이상 쩍 벌리고 섰다. 허리를 단 1도 숙이지 않고 오로지 무릎의 탄력과 팔의 움직임만으로 조심스레 얼굴에 물을 끼얹는다. 지금 내 맘대로 허리를 굽혔다가는 오늘 그대로 주저앉아 119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다.

     

    조심조심 세수하고 양치까지 끝마치고 나니 다행히 날카롭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안방 침대로 걸어가 양말을 꿰어 신는 일이다. 절대 상체를 앞으로 숙여서는 안 된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고, 허리는 꼿꼿이 세운 채 손가락 끝만 움직여 양말을 발가락에 걸었다. 천천히 당겨 올렸다.

    무사히 양말 두 짝을 다 신었다. 야호. 오늘도 불판 앞에 설 자격을 겨우 얻어냈다.

     

    넷플릭스 미생 4부 엔딩 화면 캡처

     

    비 그친 뒤의 골목, 그리고 휴일의 빗자루

    어제 현충원에서 만난 장대비가 공기를 싹 씻어냈는지, 새벽 공기가 제법 선선해졌다. 가을 냄새가 훅 끼쳐온다.

    오늘 아침엔 오전 9시 30분까지 토스트 18개 단체 예약이 잡혀 있었다. 예전에 아들 녀석 어린이집에서 영양사로 일하셨던 분인데, 지금은 행주산성 먹거리촌에서 꽤 규모가 큰 곤드레나물 밥집을 운영하고 계신다. 종종 출근길에 들러 직원들 아침 간식으로 토스트를 주문하는데, 18개나 되는 걸 보면 그 밥집도 일하는 식구가 꽤 많은 모양이다. (남의 식당 잘되는 꼴 보면서 부러워하면 지는 건데, 솔직히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9시 반 칼같이 맞춰 단체 주문을 넘기고 때마침 매장으로 들어온 아들 녀석에게 따끈하게 토스트를 구워 늦은 아침을 챙겨 먹였다. 한숨 돌리고 카운터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는데, 오피스텔 건물 청소 관리하시는 주임님이 빗자루를 들고 왔다 갔다 하신다. ‘어라? 오늘 추석 연휴라 쉬는 날일 텐데?’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어, 아들에게 부탁해 내가 마시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코카콜라 제로 뚱캔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여드리고 말을 건넸다. "주임님, 오늘 연휴인데 어떻게 나오셨어요?" "아이고 사장님, 오늘 원래 쉬는 날이 맞긴 한데 말야. 4일 연휴 내내 손을 놓으면 건물이 아주 쓰레기통이 될 것 같아서 걱정돼서 나왔어!"

     

    주임님은 땀을 훔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신다. 그렇지 않아도 연휴 동안 오피스텔 주변에 나뒹구는 담배꽁초와 테이크아웃 컵들을 보며 속으로 ‘골목 꼴 참 볼만하다’ 혀를 차고 있었는데, 얼마나 고맙고 든든한지 모른다.

     

    사실 오픈 초기에는 나 역시 매일 아침 일찍 나와 건물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남들이 버린 담배꽁초를 줍고 바닥을 쓸곤 했다. 하지만 꼬박꼬박 비싼 임대료에 관리비까지 바치면서, 내가 왜 건물주 좋은 일 시키며 남의 쓰레기까지 치우고 앉아있나 회의감이 들어 손을 털었다. (뭐, 깊게 들여다보면 사람 관계에서 오는 더 큰 이유가 있긴 한데, 여기서 주절거리면 내 꼴만 좀스러워지니 그냥 묻어두기로 한다.)

     

    옥상 위의 장그래, 그리고 미생의 다짐

    단체 건을 쳐내고 나니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매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유리문 너머로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뜸하다.

    이럴 땐 나도 내 숨구멍을 좀 틔워줘야 한다. 추석 연휴에 남들 놀러 갈 때 나와서 불판 지키는 것도 서러운데, 이 빈 시간에 나 혼자라도 좋아하는 걸 보며 힐링해야 버티지 않겠는가. 얼마 전부터 넷플릭스로 다시 정주행 중인 드라마 《미생》 4부를 틀었다. 인턴 시험에 턱걸이로 붙어 2년 계약직 딱지를 달고 영업 3팀으로 첫 출근한 날. 바람이 사납게 부는 원인터내셔널 옥상에서, 오상식 과장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주눅 든 장그래의 뒤통수에 대고 툭 던지는 명대사가 흘러나온다. 

     

    … 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完生)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니까. 우린 아직 다 미생(未生)이야."

     

     

    바람 부는 옥상에서 덤덤하게 날아와 박히는 그 대사를 곱씹는데,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왈칵 치밀어 오른다.

    내 인생도 여전히 불완전한 미생이다. 쉰이 넘은 나이에 좁아터진 주방에서 기름 연기를 마시며 버티는 것도, 조만간 이 가게를 접고 살벌한 아스팔트 길거리 위로 개인택시를 몰고 나가려는 것도, 결국에는 내 가족들과 함께 어떻게든 '완생'으로 가기 위한 처절한 버팀질이다. 버텨내지 못하면 판 위에서 맥없이 뜯어먹히고 영원히 죽은 돌(사석)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게 자영업자의 숙명 아닌가. 우리 모두가 판을 끝내는 완생을 꿈꾸지만, 아무나 완생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인생이 이토록 시리고 아픈 모양이다.

     

    닭 한 마리와 한강의 바람

    오후 1시가 훌쩍 넘어서야 배민으로 배달 한 건이 간신히 들어왔다. 그 한 건을 빼주고 나자 매장 안에는 다시 에어컨 실외기 소리만 낮게 깔렸다. 배달 알림음도, 전화벨도 울리지 않는 적막. 주말인 오늘은 오후 3시까지만 바짝 영업하고 문을 닫는다.

    마감 청소를 서둘러 끝내고, 바로 옆 건물에 있는 KFC 에서 쿠폰 신공을 발휘해 갓 튀긴 치킨 한 통을 포장해 들고 나갈 생각이다. 행주대교를 시원하게 건너 고양한강공원으로 향해야겠다.

     

    아들 녀석과 잔디밭에 서서 글러브 끼고 신나게 캐치볼도 하고, 강바람 맞으며 자전거 페달도 힘껏 밟아볼 작정이다. 비가 그친 뒤라 하늘도 높고 덥지도 않으니, 가족끼리 바람 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다. (이런 날이라도 아비 노릇, 남편 노릇 한번 제대로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 주식 계좌도 지금은 허덕이는 미생 포지션이지만, 언젠가는 든든하게 살아남아 완생의 포트폴리오로 우뚝 섰으면 참 좋겠다.

     

    오늘 하루,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바둑돌을 놓으며 버텨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미생들이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 오늘 하루치 바둑을 무사히 버텨냈다.

     


    [D-35 오늘의 마감 정산]

    • 오늘의 총매출: 8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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