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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37] 낙하산 장그래와 12년 만의 미생
    삶과 사유의 기록/50대 인생 2막 도전기 2026. 9. 2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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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저녁을 먹고 곧장 아들방 침대로 기어들어가 쓰러지듯 누웠다. 전날 밤 오랜만에 마신 소주 1병에 뒤척이며 잠을 설쳤더니 온몸의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밥 먹고 바로 눕지 말라는 아내의 쏘아붙이는 잔소리도 어제는 없었다. (내심 요즘은 이 눈치 안 보는 고요한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등을 대자마자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며 깊은 잠이 쏟아져 들어왔다. 토스 앱을 켜서 계좌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미국 본장이 열리려면 아직 3시간도 더 남았다. 잠이 보약이라는 옛말을 온몸으로 실감할 즈음, 눈을 떠보니 새벽 4시 30분이다.

     

    머리맡의 폰을 집어 들고 토스 앱부터 켰다. 밤사이 장중에 -5%까지 사정없이 밀려 내려갔다가, 장 후반에 반등하며 낙폭을 제법 줄여놨다. 최종 -2.5%. 그래, 이 정도 선방만 해줘도 감지덕지다. 계좌가 덜 무너지니 아침 공기부터가 한결 상쾌하다.

    출근 준비로 양말을 꿰어 신으러 안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고양이 두 놈 중 큰 형 녀석은 화장대 위에 우아하게 자리를 잡았고, 작은 놈은 침대 한구석에 네 다리를 대자로 뻗은 채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참으로 속 편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양말을 당겨 신으며 괜스레 대자로 뻗은 작은 놈 배를 슬쩍 쓰다듬어본다.

    (가장이라는 놈은 새벽부터 앞치마 챙겨 매고 나가는데, 너희 팔자가 상팔자다.)

     

    텅 빈 가게 앞, 그리고 12년 전 장그래를 다시 만나다

    추석 연휴 첫날 새벽. 매장 앞에 도착해 보니 평소 건물 헬스클럽을 찾던 차들이 한 대도 주차되어 있지 않다. 오늘은 헬스장도 문을 닫는 날인가 보다. 잠을 푹 자고 났더니 흐리멍덩하던 머리가 맑아져 오픈 준비도 제정신으로 척척 해치운다.

    에스프레소 머신 예열 버튼을 켜두고 잠시 폰을 만지작거렸다. 요즘 유튜브에서 ‘르센느’라는 신인 아이돌 영상이 자꾸 눈에 밟힌다. 내가 굳이 찾아본 것도 아닌데, 언젠가 쇼츠를 멍하니 몇 번 봤더니 알고리즘 놈이 내 피드를 통째로 점령해 버렸다. ‘거제 야호’라는 자체 콘텐츠로 눈도장을 찍었다는데, 요즘 찍어내는 다른 아이돌과는 결이 사뭇 다르다. 풋풋하고 구김살 없는 모습이 꼭 내 딸내미 같아서 귀엽고 대견스럽다.

     

    연휴 첫날이라 어제처럼 개미 한 마리 안 오면 어쩌나 내심 쫄아있었다. 다행히 평소 평일 수준만큼 배달 알림이 울리고 홀 워킹 손님도 드문드문 발걸음을 한다. 택시 기사들은 길거리에서 손님 태우고 뱅뱅 돌아봐야 시간당 2~3만 원 매출 찍기도 벅차다던데, 토스트카페는 한 시간 몰아칠 때 4~5만 원을 가뿐히 넘기기도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매출 덩치만 클 뿐, 재룟값에 배달 수수료 떼고 나면 손에 쥐는 마진이 턱없이 쥐꼬리라는 게 결정적인 함정이다.

     

    주문이 한 번에 몰아치지 않고 띄엄띄엄 들어오길래 넷플릭스를 켜고 드라마 《미생》을 다시 틀었다. 나는 웬만하면 한 번 본 영화나 드라마를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다. 세상에 새로 쏟아지는 걸 보기에도 인생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데, 봤던 걸 다시 붙잡고 있는 건 시간 낭비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미생이 다시 보고 싶었다.

     

    화면 속 어리숙하게 서 있는 장그래가 꼭 지금의 나 같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보던 르센느의 정원이라는 친구가 장그래처럼 보이기도 해서다. 코앞으로 다가온 카페 폐업을 앞두고, 50줄의 나이에 다시 맨땅에 헤딩하듯 새로운 길로 발을 디뎌야 하는 나란 인간. 스펙도, 밑천도 변변찮은 장그래가 대기업 상사에 낙하산으로 꽂혀 겪어내는 그 막막한 현실이 지금의 내 처지와 기가 막히게 닮아있다.

     

    내가 조만간 개인택시를 잡고 운전대를 쥐게 된다면, 나 역시 길거리의 완벽한 ‘낙하산’이다. 장그래는 대기업 전무가 회사에 꽂아 넣어줬지만, 나는 내 주머니 털어 피 같은 돈으로 택시 면허를 사서 길바닥에 뛰어든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운전 경력도, 영업 노하우도 턱없이 부족한 늙은 초짜가,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아스팔트 길거리 위로 냅다 뛰쳐나가는 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품고 미생을 다시 곱씹어 보니, 10여 년 전 처음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씁쓸한 향기와 묵직한 맛이 목구멍으로 넘어온다. 《미생》이 2014년에 방영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딱 12년 전이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강산이 변해도 참 무섭게 변했다. 모니터 앞에서 서툴게 엑셀 파일을 만지작거리는 장그래를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만감이 교차한다. 지금은 메타에서 ‘뮤즈’ 같은 AI를 떡하니 내놓아, 인공지능이 알아서 기차표 티켓팅부터 호텔 예약까지 싹 다 해치워주는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12년 전엔 엑셀만 잘해도 살아남았는데, 이젠 인공지능과 경쟁하며 길바닥으로 나가야 한다니.)

     

    폐업을 하면 매일 아침 내려먹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라떼도 돈주고 사먹어야하니 이게 제일 아쉽다.

     

    비명 지르는 매장 스피커, 그리고 달콤한 조기 마감

     

    연휴라 배달이 영 뜸할 줄 알았는데,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쿠팡이츠에서 주문이 간간이 꽂힌다. 늘 혼자 중얼거리지만, 배달 주문은 냉장고 재료 소진용일 뿐이다. 플랫폼 수수료 뜯기고 라이더비 보태주고 나면 마진이 눈곱만큼도 안 남아 조리를 하면서도 손에 영 힘이 안 들어간다.

     

    그러나 그 순간. 12시 35분, 포스기에서 ‘네이버 주문’ 알림이 쨍하게 울리더니, 12시 39분에 배민과 쿠팡이츠 배달 주문이 1초 간격으로 연달아 터졌다. 컴퓨터 본체와 연결해 둔 매장 스피커가 비명을 지르듯 요란하게 울려댄다. (하, 샤갈. 이놈의 배달 알림은 꼭 손 모자랄 때 쌍으로 쳐들어온다.)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반사적으로 식빵을 굽고 계란 샐러드를 담는다. 그래도 찾아주는 손님이 있으니 감사하며 몸을 움직여야지 별수 있겠는가. 공휴일인 오늘은 오후 3시까지만 바짝 영업하고 셔터를 내린다. 그리고 내일 추석 당일은 매장 문을 완전히 닫고 쉰다. 몇 달 만에 맛보는 온전한 하루 휴식인지 모르겠다.

     

     

     

    아내가 미리 사놓은 전과 송편. 추석이구나. ㅎㅎ

     

    시장 골목의 사람 냄새, 그리고 내일을 위한 밥상

     

    서둘러 마감 청소를 끝내고 나면 근처 원당시장으로 곧장 달려갈 생각이다. 아내가 좋아하는 짭조름한 간장게장도 좀 사고, 우리 내외가 환장하는 매콤새콤한 홍어무침은 화정홍어무침에 들러 픽업해 올 예정이다. 오늘 저녁 식탁엔 양념 잘 밴 LA갈비를 지글지글 구워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배 터지게 먹을 작정이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니, 명절이라 해도 딱히 찾아갈 고향 집이 없어졌다.처가댁은 다음 달에 장인장모님이 우리집으로 올라오실 예정이라 패스했다)

     

    현충원은 명절 당일에 가봐야 차만 막히고 인파에 치여 고생길이 훤하니, 부모님 뵈러 가는 길은 다음 주 주말쯤 한산할 때 다녀올 생각이다(동작동 현충원 충혼당에 부분을 합장하며 모셨다). 오늘 저녁엔 가족들과 푸짐하게 둘러앉아 맛있는 밥 한 끼 배불리 먹고, 내일은 평촌에 계신 작은아버님 댁에 들러 얼굴 뵙고 인사나 잠시 올리고 와야겠다.

     

     


    [D-37오늘의 마감 정산]

    • 오늘의 총매출: 18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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