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42] 주말의 안도감, 그리고 60개의 토스트를 굽는 시간삶과 사유의 기록/50대 인생 2막 도전기 2026. 9. 19. 16:50반응형
새벽 4시의 기상과 초록 불이 켜진 주말
오랜만에 마음 한구석이 평온한 주말 아침이다.
새벽에 눈을 떠 습관처럼 들여다본 미국장. 우리 집안의 주력인 실리콘모션이 +7.4% 급등으로 장을 마감했다. 주초만 해도 -16%라는 파란 불을 띄우며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더니(이러다 원금 다 까먹는 건 아닌지 속이 타들어갔다), 다행히 연이틀 꽉 찬 양봉을 띄우며 제 가격을 찾아갔다. 주식 창의 초록 불 하나에 한 주간 짓눌렸던 어깨가 스르르 풀린다. 주식이 오르니 가족의 행복도 슬그머니 따라오는 기분이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새벽 4시부터 눈이 번쩍 뜨였다. 옆을 보니 큰형 만두(고양이) 녀석이 내 팔베개를 베고 곤히 잠들어 있다. 매일 간식을 챙겨준 보람이 있는지, 요즘은 잠자리도 꼭 내 곁을 지킨다. 막내 호두 녀석은 진작에 안방 침대 차지다. 만두마저 없었으면 아들 찬 방에서 혼자 잘 뻔했는데(가장이라는 자리가 가끔은 이렇게 서글프다), 든든하게 곁을 내어주는 만두 녀석에게 오늘도 특급 간식을 상으로 내려야겠다.
미리 들어온 단체 주문 덕에 오늘 하루 기본 매출은 이미 확보해 둔 상태였다. 그래, 주말은 적어도 이래야 숨통이 트이지.
한산한 홀과 옆집 대하구이의 씁쓸한 활기
자영업의 주말 흐름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어떤 날은 숨 쉴 틈 없이 배달 주문 벨이 울려대고, 어떤 날은 거짓말처럼 고요하다. 오늘은 비교적 한가한 날이었다. 오전에는 늘 주문해 주는 단골 학원에서 배달 주문이 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햄치즈 단품 6개와 따뜻한 스프 6개를 시켰다. 이어지는 자잘한 배달 주문 몇 건, 그리고 같은 오피스텔에 입주한 대하구이집에서 간식으로 토스트 콤보 4개를 주문해 왔다.
요즘 우리 오피스텔 상가는 한 달 전 들어선 대하구이집으로 연일 북새통이다. 6개월 단발 계약, 이른바 ‘떴다방’ 식으로 내년 1월까지만 치고 빠지겠다며 들어온 집인데 장사가 이렇게 대박이 날 줄은 나는 몰랐다. 번듯한 인테리어도 하나 없이 환한 조명 몇 개 달아두고,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만 깔아둔 채 새우와 전어를 파는데 동네 사람들이 몽땅 그 집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제는 가게 앞 인도까지 야장을 쫙 깔았는데도 빈자리가 없었다. 유동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상권이다 보니, 손님을 그 집이 다 흡수해 근처 매장들은 자연스레 손가락을 빠는 처지가 됐다(내 가게 앞 골목인데도 남의 축제를 구경하는 기분이란 참 묘하다).
장사가 잘되는 만큼 오피스텔에 쌓이는 쓰레기도 어마어마하다. 지하 분리수거장은 매일 터져 나가고, 원래 한 개면 넉넉했던 음식물 쓰레기통은 주말마다 시뻘건 국물과 껍질로 흘러넘친다. 다행히 새로 오신 오피스텔 청소관리 주임님이 워낙 성실하고 꼼꼼한 분이라 묵묵히 다 치워내고 계시지, 예전 분 같았으면 입주민들 원성으로 진작에 난리가 났을 터였다.

깔끔하게 단체주문 조리완료 홀로 남은 주방, 60개의 토스트와 저녁의 식탁
주말은 오후 3시면 정규 영업을 마친다. 배달 앱들을 하나둘 끄고 매장 문을 잠갔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오후 2시 30분부터 준비해 온 단체 토스트 60개 단품 주문 조리에 들어갔다. 단체 주문은 미리 들어와 시간 안배를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니 큰 무리는 없다. 실리콘 장갑을 팽팽하게 당겨 끼고 빵을 굽고 계란을 부친다.
홀로 주방에서 기계처럼 손을 움직일 때는 매장 음악을 끄고 오디오북이나 넷플릭스를 틀어둔다. 오늘은 그저께부터 보기 시작한 드라마 <다운타임>을 틀었다. 처음엔 그저 삼류 양아치들이나 성형을 다룬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회차가 거듭될수록 묘하게 사람 생각을 많아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나는 드라마를 볼 때도 책을 읽듯 대사와 자막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가며 본다. 대사가 귓가에 온전히 걸리지 않거나 이해가 안 되면 10초 뒤로 되감기를 눌러 다시 확인한다(드라마 한 편 보는 것마저도 이토록 피곤하게 군다). 이번 <다운타임>은 그렇게 시간을 들여 정주행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60개의 토스트를 포장 상자에 빈틈없이 채워 넣고 무사히 배송을 마쳤다. 실리콘 장갑을 벗어 던지니 손끝이 땀으로 퉁퉁 불어 있다.
오늘 저녁은 와이프 책을 출간해 주는 출판사에서 고맙게도 보내준 싱싱한 새우, 그리고 동네 부대찌개 맛집에서 포장해 온 칼칼한 전골이다. 매장 불을 끄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하루치 노동을 묵묵히 끝내고, 식탁에 마주 앉은 가족들과 나누는 맛있는 음식, 그리고 거기에 곁들이는 시원한 소주 한 잔.
인생 별거 없다. 통장 잔고와 주식 계좌가 조금씩 버텨주고, 식구들과 따뜻한 밥상머리에 둘러앉을 수 있다면, 오늘도 가장으로서 내 몫은 다한 하루다. ㅎㅎ
[D-42 오늘의 마감 정산]
- 오늘의 총매출: 476,7000원
2024.06.18 - [삶과 사유의 기록/50대 인생 2막 도전기] - 자영업자로 살아간다는 건....
자영업자로 살아간다는 건....
자영업자로 살아간다는 건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망하면서 깨달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자영업자로 부푼 꿈을 꾸며 작년 23년 7월 오픈 한
trailsn.tistory.com
반응형'삶과 사유의 기록 > 50대 인생 2막 도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D-40] 폐업을 앞두고 찾아온 뜻밖의 단골들, 그리고 묵직한 월요일 (2) 2026.09.21 [D-41] 새벽 4시 반의 썰물, 그리고 일요일을 버티는 법 (1) 2026.09.20 [D-43] 폐업을 앞두고 터진 예약 풀, 삶의 기막힌 타이밍 (4) 2026.09.18 [D-44] 토스트 60개 예약 주문과 3천만 원짜리 미련, 그리고 핸들을 잡기로 했다 (2) 2026.09.17 [D-45] 아침 폭격과 하루키,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사치 (3) 2026.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