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D-31] 아들의 첫 번째 달리기와 안산터미널로 달린 하루
    삶과 사유의 기록/50대 인생 2막 도전기 2026. 9. 30. 19:05
    반응형

    어제저녁 밥을 대충 물리고 아들 침대에 널브러져 쉬고 있는데, 녀석이 불쑥 하얀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던져놓고 간다. "이게 뭐냐?" 하고 열어보니 육상부 입단 부모 동의서다. 추석 전에 학교에서 테스트를 본다더니 덜컥 통과를 해 온 모양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통 알 수가 없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수준의 특별활동이겠지만, 50대 애비 마음엔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처럼 앞선다. 솔직히 내 마음 같아서는 운동 쪽은 발도 안 들였으면 싶었다. 운동해서 밥 벌어먹고 사는 게 얼마나 모진 길인지 뻔히 아니까.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달리기에 재미가 들려 제 발로 해보겠다고 덤비니, 아내도 일단 시켜보자며 서명까지 일찌감치 다 끝내놓은 상태였다.

    밥상머리에서 아들 녀석 얼굴을 보며 "진짜 잘할 수 있겠어?" 넌지시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 씩씩하게 잘할 수 있단다. 남들보다 한참 일찍 등교해서 아침 훈련을 뛰어야 한다는데. 인생을 살면서 제 스스로 처음 선택해 걸어보는 길이라 응원은 해준다마는, 과연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머릿속엔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래, 제 인생 지가 뛰어보는 거지.)

     

    갤럭시 통화녹음이 살린 수요일, 그리고 점심의 소동

    아침에 카페 문을 열고 커피머신을 켜는데, 불현듯 지난 월요일에 들어왔던 단체주문 건이 뇌리를 스쳤다. 장부를 뒤져보니 메모를 깜빡하고 안 적어뒀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부랴부랴 휴대전화를 켜서 월요일 통화녹음 파일을 찾아 재생했다. 다행히 오늘 수요일 오후 2시까지 가져다 달라는 주문이었다. 정말 갤럭시 통화녹음 기능이 아니었으면 신용 깎아먹는 대형사고를 칠 뻔했다. 내가 이래서 애플 아이폰은 거들떠도 안 보고 삼성을 사랑한다. 마감까지 시간 여유가 넉넉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을바람이 제법 불어서인지 점심엔 손님이 눈에 띄게 늘었다. 월 장부 쓰는 인근 사무실 주문을 필두로 12시 땡 치자마자 손님들이 줄지어 밀고 들어왔다. 날이 선선해도 점심엔 에어컨을 풀로 틀어둔다. 문을 열어두면 양옆 건물 틈새에서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홀 안으로 은근슬쩍 기어들어와 숨을 턱 막히게 하기 때문이다. 밥 먹는 손님 코앞에 담배 냄새라니, 장사하는 입장에선 피가 마른다. (길 건너 새로 생긴 제과점 사장 아들놈은 왜 꼭 담배를 피울 때마다 길을 건너와 우리 매장 옆 공실 앞에서 뻐끔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몇 번이나 쫓아가 한소리 하려다 가슴 속에 참을 인 자 세 번을 꾹꾹 눌러썼다.)

     

    그렇게 땀을 훔치며 한창 주문을 쳐내고 있는데, 단골 중년 여성 손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네이버 주문 다 됐나요?" 포스기를 보니 들어온 게 전혀 없다. "손님, 네이버로 들어온 주문이 없는데요?" 손님이 갸우뚱하며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는데, 장바구니에만 담아두고 결제 완료 버튼을 안 누른 거다. (아이고, 두야...) 손님은 당황해서 키오스크로 달려가 허겁지겁 결제를 눌렀고, 덩달아 내 손도 두 배로 바빠졌다. 목덜미에 땀이 삐질 솟구치는 와중에 밀린 주문 다 빼고, 아주머니 손에 샌드위치와 토스트를 쥐여 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안산터미널에서 장인어른. 구부정한 허리가 보여 마음이 헛헛하다.

     

    평일 오후 4시 20분 안산터미녈 대합실. 정말 사람이 없다.

     

     

    셔터를 내리고 안산으로, 위태로운 장인어른의 뒷모습

     

    한숨 돌리려던 오후 1시 56분,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장사하는 시간엔 방해될까 봐 웬만하면 톡을 남기는 사람인데, 전화벨이 울리니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받자마자 "톡 좀 얼른 봐줘" 하고 끊는다. 맥북에 켜둔 카톡 창을 여니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평소와 달리 다급하면서도 꽤나 공손한 말투다.

     

    내일 일신병원 신장내과 진료 때문에 군산에서 장인어른이 올라오시는데, 차편이 꼬였단다. 늘 타시던 오후 2시 버스가 몇 달 사이에 노선이 바뀌어 고양터미널까지 안 가고 안산터미널까지만 운행한다는 거다. 고양으로 바로 오는 막차는 밤 9시에나 있어서, 여든 넘은 노인네가 안산에서 대여섯 시간을 멍하니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안산까지 차를 몰고 마중을 나가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

     

    가게를 조기 마감해야 하는 상황. 잠깐 계산기를 두들기다 "알겠다, 다녀오겠다"고 답을 보냈다. 요 며칠 냉랭하게 감정의 골이 남아 있던 아내에게서 '미안하고 정말 고맙다'는 톡이 연달아 날아왔다.

     

    부랴부랴 배달 어플 다 끄고 셔터를 내렸다. 강변북로에 차를 올리는데 매장 전화가 연결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인근 고등학교 선생님의 단체 주문 전화였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개인 사정으로 조기 마감을 해서 주문을 못 받습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돈 쓰겠다는 손님이 외려 죄송하다고 하니 참 민망하고 씁쓸했다. (눈물을 머금고 오늘 매출 몇만 원을 아스팔트 위에 그냥 버렸다.) 그나마 밀리의 서재로 듣던 '오로라 맨숀'을 오가는 길에 완청할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오후 4시 10분, 안산터미널에 닿았다. 평일이라지만 주차장도 텅텅 비었고, 대합실 안은 적막감이 감돌 정도로 썰렁했다. 지방 터미널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다는 뉴스는 봤어도, 명색이 경기권 대도시 터미널인데 이 정도로 사람이 없을 줄은 몰랐다. 인구가 줄어든 탓인지, 다들 자가용이나 기차로 갈아탄 탓인지, 황량한 풍경에 마음이 참 헛헛했다.

     

    4시 반이 넘자 저 멀리서 호리호리하고 구부정한 체구의 장인어른이 대합실로 들어오셨다. 작년에 신장 치료를 받고 군산 내려가실 때, 제발 일 좀 손에서 놓고 몸조심하시라고 그렇게 당부를 드렸건만. 내려가신 지 몇 달 만에 기어이 트랙터에 올라탔다가 떨어져 허리를 다치셨다. 그때도 서울 올라와 보름 넘게 입원하고 아내가 병간호하느라 파김치가 됐었는데,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았는지 걸음걸이가 전보다 훨씬 더 구부정하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내 아버지와 동갑이신데, 흙 만지며 평생을 사신 분이라 그런지 숟가락 쥘 힘만 있어도 일을 놓지 못하신다. 그 지독한 고집이 안쓰러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3개월마다 진료받으러 딸네 집에 올라오시는데, 오늘은 다리 아픈 장모님까지 시골집에 홀로 떼어놓고 혼자 버스에 몸을 실으셨다. 늙어간다는 건, 저렇게 몸의 한계 앞에 활동 반경을 야금야금 빼앗기는 일인 모양이다.

     

    퇴근길 정체에 갇혀 1시간 40분 만에 겨우 집에 도착했다. 그동안 아들 침대 차지하고 편하게 잤던 호사도 오늘로 끝이다. 작은방을 장인어른께 내어드려야 하니, 오늘 밤은 오랜만에 아내와 한 침대에서 합방을 하게 생겼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ㅎㅎ)

     

    잠깐 매장에 들러 마감 정리를 하고 블로그에 글 한 편을 털어 넣은 뒤 나서는 길, 차가운 밤하늘에서 비가 한 방울씩 툭툭 떨어진다. 매출은 좀 손해 봤지만, 가족들 챙기고 내 할 도리 다했으니 이만하면 오늘 하루도 헛되이 보내진 않았다.

     


    [D-31 오늘의 마감 정산]

    • 오늘의 총매출: 204,200원 

     

     

    2024.06.18 - [삶과 사유의 기록/50대 인생 2막 도전기] - 자영업자로 살아간다는 건....

     

    자영업자로 살아간다는 건....

    자영업자로 살아간다는 건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망하면서 깨달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자영업자로 부푼 꿈을 꾸며 작년 23년 7월 오픈 한

    trailsn.tistory.com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