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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2] 차가운 새벽 공기와 86개의 햄치즈 토스트, 그리고 안세영삶과 사유의 기록/50대 인생 2막 도전기 2026. 9. 29. 18:01반응형
아침 6시 출근길. 잠바를 여며 입었는데도 바짓단 틈새로 파고드는 새벽바람이 꽤 차갑다. 슬슬 계절이 바뀌려나 보다. 개인적으로 더위보다는 겨울 쪽을 훨씬 좋아하니, 이 시린 공기마저 반갑게 느껴진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조명을 켜고 커피머신 예열 버튼을 눌렀다. 머신이 웅웅거리며 열을 올리는 사이, 루틴처럼 야후 파이낸스를 켜고 미국 시황을 훑었다. 정리해서 블로그에 글 한 편을 털어 넣었다. 벌써 한 달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온 작업이다. 마음 같아서는 주식 투자를 완전히 접는 날까지 이 짓을 계속하고 싶다. 꾸준함이 쌓여야 비범함이 되는 법이고, 하루아침에 늘어나는 재주는 세상에 없다. 장사든 주식이든, 엉덩이 무겁게 붙이고 버티는 놈이 결국 이긴다.
오전 9시의 자전거, 그리고 18개의 단체 샌드위치
청소와 오픈 준비를 얼추 끝내니 오전 8시. 슬슬 시동이 걸릴 시간이다. 8시 25분, 28분에 연달아 배달과 포장 알림이 울렸다. 8시 45분쯤엔 참새 방앗간 들르듯 오는 단골 손님 두 팀이 들어와 커피를 주문해 나갔다. 숨을 좀 돌리려던 9시 정각, 매장 유리창 너머로 낯익은 자전거 한 대가 멈춰 섰다. 아내와 함께 고양시 시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시는 노신사분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조심스레 입을 떼신다.
"어제 문자를 드렸는데 답이 없으셔서 직접 들렀습니다. 혹시 오늘 낮 12시까지 샌드위치 18개, 반 개씩 포장 가능할까요?"
순간 머릿속 계산기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계란은 얼마나 삶아뒀지? 베이컨 재고는? 토마토, 식빵, 양파는 넉넉한가? 1분 남짓한 정적 끝에 대답을 내놓았다.
"네, 가능합니다. 제시간에 맞춰 준비해 두겠습니다."
어르신이 안도하며 웃으시곤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출근길을 재촉하셨다. 손님이 나가자마자 휴대폰을 뒤져보니, 어젯밤 10시 40분에 문자가 와 있었다. (피곤에 절어 곯아떨어져 있었으니 확인할 리가 있나. 그래도 밤 10시가 넘어서 주문 문자를 보내시면 어쩌란 말인가...)
투덜거릴 틈도 없이 배달의민족, 요기요, 쿠팡이츠 어플을 모조리 껐다. 대략 15만 원 돈이다. 플랫폼 수수료 떼이지 않는 단체 포장 주문이니, 이 정도면 점심 전 기본 매출은 든든하게 확보한 셈이다. 쇼케이스를 열어보니 다행히 양상추도 10통 가까이 쟁여져 있고, 삶은 달걀과 토마토도 넉넉하다. 장사는 언제 어디서 주문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노릇이라, 재료는 항상 넘치듯 채워둬야 가슴이 졸이지 않는다.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헤드폰을 쓰고 밀리의 서재에서 장지연 작가의 오디오북 '오로라 맨숀'을 틀었다. 넷플릭스로 보던 '미생'의 장그래는 짠하면서도 중간중간 숨통 트이는 재치가 있어 편하게 응원하며 봤는데, 이 소설은 고아원에 남겨진 형제가 바닥에서 버텨내는 이야기라 듣는 내내 가슴이 턱턱 막힌다. 아직 초반부지만, 결말까지 저 어린것들이 너무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의 집 소설 속 불행에 마음 쓰면서도 내 손은 기계처럼 샌드위치 랩을 팽팽하게 당겨 말고 있다.)

BLT샌드위치에 들어가는 베이컨 18개. 
포장도 이쁘게 ㅎㅎ. 교회 초등부의 전화, 그리고 단체주문의 미학
정오가 되자 어르신이 오셔서 샌드위치를 챙겨가셨다. 카운터에서 카드를 긁는다. 배달 수수료 한 푼 안 뜯기고 고스란히 남는 알짜 매출이다. 점심시간에는 다행히 손님들이 시간차를 두고 5팀 정도 들어와 준 덕에 큰 지체 없이 주문을 다 쳐냈다. 1시도 안 되어 매출 20만 원을 가뿐히 넘겼다. '오늘은 좀 수월하게 넘어가나 보다' 싶던 오후 2시 20분, 매장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우리 식구가 다니는 교회의 초등부 선생님이란다. (사실 내게는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다. 일요일마다 토스트 굽느라 교회 문턱도 못 밟아본 지 오래되었으니 알 턱이 없다.)
"10월 4일 오전 11시까지, 교회 신관 6층 초등부실로 햄치즈 86개 배달 가능할까요?"
"아, 네! 당연히 가능합니다. 감사히 잘 준비해 두겠습니다!"
목소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토스트 가게 매출의 꽃은 결국 단체주문이다. 낱개로 서너 개씩 배달 보내며 라이더 기다리고 수수료 떼이는 것보다, 한 번에 대량으로 쳐내는 게 같은 품을 들이고도 이윤이 훨씬 크다. 일요일에 예배당 자리 하나 못 채우는 못난 가장이지만, 기도는 집사람과 아들이 내 몫까지 배로 해줄 테니 괜찮다.
전화를 끊자마자 또 벨이 울린다. 이번엔 근처 돌봄유치원 선생님이다. 목소리 톤만 들어도 단번에 안다. "선생님, 오늘도 샌드위치 5개 포장 부탁드려요." 선생님들 간식으로 늘 전화 주문을 주시고는 직접 걸어와서 카드를 긁어주시는 고마운 단골이다. 감사한 마음에 양상추를 한 장 더 넉넉히 얹었다.

돌봄 교실에서 주문한 BLT 샌드위치 5개. 오늘은 총 23개를 만들었다. 안세영의 금메달과 묵묵히 흘러가는 세상
오후 4시 무렵, 뒷정리를 하며 켜둔 뉴스에서 배드민턴 금메달 소식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여자 복식이 중국을 꺾더니, 뒤이어 안세영 선수가 단식 결승에서 일본을 완파하고 2연패를 달성했단다.
경기를 지켜보는데 감탄을 넘어 헛웃음이 나온다. 우와, 대단하다, 미쳤다 소리가 절로 터진다. 저 나이에 저런 악바리 같은 근성과 실력이라니. 지구상에서는 적수가 없어 외계인이라도 데려와야 할 판이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코트를 악착같이 기어 다니며 셔틀콕을 받아내던 지난 경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승리는 없다.
주말 단체 예약이 든든하게 잡혀 있으니 오랜만에 마음이 제법 가볍다. 가게 문을 닫을 채비를 하는 오후 6시, 바깥이 부쩍 일찍 어둑어둑해진다. 뉴스에서는 도쿄에 33일째 비가 내려 역대 최장 가을 장마를 기록하고 있다며 난리이고, 설악산에는 벌써 첫 단풍이 내려앉기 시작했단다.
내가 주방 안에서 버터 냄새에 절어 하루를 아등바등 보내든 말든, 세상은 제 시계대로 쉼 없이 변하고 흘러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빠른 세상의 보폭을 쫓아가는 게 버겁고 숨이 차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는 땀 흘려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새벽 6시부터 불판 닦고, 샌드위치를 말고, 주말 단체주문까지 야무지게 받아냈으니 이만하면 됐다. 오늘 밤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다리 쭉 뻗고 누워도 될 자격이 내게는 충분하다.
[D-32 오늘의 마감 정산]
- 오늘의 총매출: 29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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