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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기름 냄새 배인 주방에서 마주한 '찌니주의보'… 아버지 생각에 목이 메었다삶과 사유의 기록/내가읽은 책독후감 2026. 9. 18. 17:48반응형
최근 두 달 동안 티스토리에 올린 글이 100개를 넘어섰다. 주방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배달 알람을 쳐내고, 기름때 묻은 조리대와 커피머신을 닦아내며 틈틈이 자판을 두드린 결과다. 50대 자영업자에게 장사와 글쓰기를 병행한다는 건 솔직히 보통 일이 아니다. (가끔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야밤에 눈을 비비며 이러고 있나 싶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건 마음속에 굳은 믿음 하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나온 삶의 흔적을 내 손으로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세상 그 누구도 대신 남겨주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켜켜이 쌓여 1년이 되고 10년이 되듯이,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좁은 시냇물처럼 졸졸 흐를지라도 차곡차곡 정성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큰 강을 이루고 너른 바다로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확신이 있다. 쓰다 보니 아주 조금, 손톱만큼은 글발이 붙은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순전히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오디오북을 기다릴 수 없어 종이책으로 주문한 소설
얼마 전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오디오북으로 완독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쓸쓸한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의 얼굴과 질곡진 삶의 궤적이 가슴을 묵직하게 후벼 팠다. 여운이 가시지 않던 차에 작가의 신작 『찌니주의보』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같으면 오디오북이나 전자책으로 나오길 기다렸겠지만, 이번만큼은 알라딘에서 망설임 없이 종이책을 결제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귀한 신작을 두고 편의만 따지며 기다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소설의 무대는 전라도 '수평마을'이다. 노인들만 모여 사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시골 동네에 30대 레즈비언 커플이 불쑥 이사를 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빽빽하게 박혀 있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눈에 들어왔다. 방송에서 귀로 흘려듣던 것과 달리 활자로 마주하니 어찌나 걸쭉하고 토속적인지, 같은 한국말인데도 눈을 찌푸려가며 서너 번씩 다시 읽어야 겨우 뜻이 통하는 낯선 단어들이 수두룩했다. 작가가 실제로 구례에서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던데, 그 땅의 흙냄새와 사람 냄새가 고스란히 문장에 배어 있는 모양이다.

정지아 작가의 찌니주의보 굽은 등 뒤에 숨겨진 그 시절 아버지들의 그림자
젊은 여자 둘이 부부처럼 살겠다고 들어왔으니 동네는 발칵 뒤집힌다.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윤 선생을 필두로 어르신들의 텃세와 내쫓기가 이어진다. 그 한가운데서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건 동네 이장이다. 스무 살 어린 베트남 아내 '쑤원'과 20년을 부대끼며 살아온 이장은 남들의 모진 시선을 온몸으로 견뎌내 본 사람이기에 소외된 약자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이장 부부는 성진과 혜진을 보듬고, 굳게 닫힌 노인들의 마음의 빗장을 천천히 풀어간다.
허리가 기역자로 꼬부라진 팔순의 노인들. 지금은 그저 억척스럽고 고집불통인 시골 노인네들 같지만, 그들도 한때는 뼈가 부서져라 일하며 처자식을 먹여 살렸던 이 땅의 평범한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젊음을 불살랐던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작년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 생각이 나 목이 멨다.
내 아버지도 월남전에 참전한 뒤 평생 변변한 휴식 한번 누려보지 못하셨다. 오직 가족 하나 건사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생 운전대를 잡으셨고, 기력이 쇠한 뒤에도 아파트 수위, 지하철 택배, 심지어 피를 파는 수혈까지 마다치 않으며 돈을 버셨다. 반면 못난 아들놈인 나는 사업한답시고 틈만 나면 손을 벌렸고, 결혼할 때 전셋집 구할 밑천까지 아버님 주머니를 털어갔다. (그 염치없는 짓을 다 받아주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온다.)
책 속에 나오는 윤 선생의 속 썩이는 아들 '상구'를 보며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이 났다. 어쩌면 못난 구석만 골라 나와 저리도 닮았을까. 윤 선생이 그토록 레즈비언 커플을 완강하게 밀어냈던 밑바닥에는, 자식에게 받은 깊은 배신감과 섭섭함 때문에 남의 사정을 헤아릴 마음의 여유가 바닥나 버린 노인의 서글픔이 깔려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외할머니 무릎 같던 시간, 오늘은 장인어른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책장을 덮고 나니 어릴 적 시골 외할머니댁 마당에 서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개울가에서 멱감고 풀벌레 울어대는 들판을 정신없이 내달리다, 땅거미가 질 때쯤 할머니가 끓여주신 구수한 된장찌개에 밥 한 그릇 뚝딱 비워내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까무룩 잠들던 그 시절의 냄새가 났다.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뵐 수 없는 시절이기에 마음 한편이 더욱 쓸쓸해진다.
사람 살아가는 꼴은 다 거기서 거기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 부대끼고, 서로의 모난 구석을 깎아내며 결국엔 한 식구가 되어가는 것. 조리대 불을 끄고 마감 정리를 끝내면, 오늘은 멀리 계신 장인어른께 안부 전화라도 한 통 꼭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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